유계영 시인, 에세이집 ‘꼭대기의 수줍음’ 발표
2021-10-08 이숙영 기자
민음사 문학론 에세이 시리즈 ‘매일과 영원’으로 출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넉넉하게 남아 있는 시간의 표면 위를 둥둥 떠가는 거야. 해초처럼 부드럽게. 내가 너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고 네가 나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지 않고 일하며.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삶의 형식을 우리가 발명할 수 있을까? -'노동 없이 노동하며 사랑 없이 사랑하는'에서, 102쪽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말해 보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거창하고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평상시 떠들고 다니는 나의 말들이 대개 이렇게 무모하다 느낀다. 뻔뻔해지거나 용감해지는 것 말고는 이 문제를 돌파할 지혜가 없다. 그럼에도 앞선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적어 보려 했던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뻔뻔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한 내가 무모함을 무릅쓸 만큼 잊히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빛이었다. -'사랑스러운 빛'에서, 184쪽책 제목 ‘꼭대기의 수줍음’은 높이 자란 나무들이 맨 아래의 식물들까지 빛을 볼 수 있도록 가지와 가지 사이에 틈을 벌리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무들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유계영 시인의 시선을 닮았다. 큰 나무 사이로 스민 빛 덕분에 작은 풀들이 자라날 수 있듯, 시인의 시선은 삶의 작은 기척들이 한 편의 글로 쓰일 때까지 오래 살핀다. <꼭대기의 수줍음>은 그렇게 완성된 글들의 첫 번째 화원이다. 246쪽. 정가 1만 4000원. 2torok@munhaknews.com©문학뉴스/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