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로 멸문지경에 이르렀던 가문의 부활과 활약이 망라된 기록

[문학뉴스=이재욱 기자] 대사간을 역임하였던 강형(姜詗)은 연산군의 갑자사화 때 세 아들과 함께 참형을 당한 인물이다. <대사간 강형 세가록(世家錄)>은 사화로 멸문지경에 이르렀던 한 가문의 부활과 그 후손들의 활약이 망라된 종중사(宗中史)라 할 수 있으며, 진주강씨 대사간공파 종중에서 펴냈다.

대사간 강형과 세 아들, 사위 양천인 허반까지 모두 사화로 참형을 당하고, 남겨진 큰 아들 영숙의 부인 익산이씨와 어린 7남매가 경상도 상주로 피난을 간 덕에 멸족의 위기에서 회생할 수 있었다. 또한 강형의 여섯 형제들도 모두 사화에 연루되어 참형과 유배형을 당해 온 가문이 참담한 처지에 놓였다.

이런 가문이 중종반정으로 복권은 되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손자의 대에서 대부분 소과, 대과에 급제하여 조정으로 사환(仕宦)길에 나서게 되고, 기적적으로 회생하여 머지않아 예전의 영예를 회복·번창하게 되는 대사간 강형 가문의 종중 역사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고 하겠다.

진주강씨 대사간공파 종중 편(編), 새로운사람들, 2023년 2월 6일, 값 2만 5000원
진주강씨 대사간공파 종중 편(編), 새로운사람들, 2023년 2월 6일, 값 2만 5000원

조선시대의 사화(士禍) 네 번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사화가 연산군 때 일어났는데, 이 두 번의 사화에서 강형의 사위 허반은 첫 번째 사화에서, 강형과 세 아들은 두 번째 사화에서 참변을 당한다.

대사간 강형이 참변을 당한 것은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윤씨의 입주입묘를 추진할 때 사헌부 장령으로서 독계(獨啓) 차자(箚子)로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연산군이 자신의 뜻대로 생모인 폐비윤씨의 입주입묘를 마치고 난 다음인 1504년에 자신의 생모가 사사(賜死)된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어 그 설원(雪冤)의 형태로 사화를 일으키고 독계 차자의 인물인 대사간 강형과 세 아들을 참형에 처했던 것이다.

독계 차자로 임금에게 간하는 불굴의 의지와 절의를 지키며 충신으로서의 기개와 역할을 포기하지 않은 강형은 당대뿐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보기 드문 절신(節臣)임에도 크게 주목받고 있지는 못하다. <대사간 강형 세가록>은 강형과 세 아들이 한 날 참형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손자들부터 이어지는 후손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 가문이 오랜 세월동안 유지되면서 후손들은 번창하였고, 명문거족으로서 가문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5백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늘날 옛날 왕조 시대의 체제나 유산이 통하는 세상은 아니지만, 가문의 뿌리를 이해하고, 가문의 전통과 가치인식, 교훈적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하거나 실천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셈이다.

내용의 구성을 보면 대사간 강형과 세 아들의 피화(被禍) 사실과 강형을 파시조로 하는 진주강씨 대사간공파 종중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과정, 이후 문중의 규모가 확대되고 그에 따라 등장한 주요 후손들을 소개하며 그들이 살아가는 동안 이룩한 사적들을 기록하였고, 또 그 후손들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보여준 다양한 삶의 기록들을 아울러 정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이런 과정에서 남겨지고 보존된 종중의 주요 유물과 유산, 주요 인물의 생애 등을 관련된 사항 등을 역사적 흐름을 따라 서술하고 있다.

대사간 강형은 한양의 서소문 부근에 집성촌을 이루었다가, 사화를 피해 경북 상주로 피난을 갔기에, 대사간공파 문중은 서울과 상주 두 지역을 중심으로 세거지(世居地)를 형성하게 되었고, 상주는 오늘날까지 대사간 문중의 주된 세거지가 되었으며, 영남 남인학파의 주축이었던 대사간 후손들이 조선 후기에는 상주를 중심으로 산림의 학자 군을 이루며 학문연구와 문학 활동에 크게 기여하기도 하였다.

“여전히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눈에 띄지만, 문중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후손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에서 종중에 도움이 될 것으로 봅니다.”

대표 집필을 맡았던 강화석 한국외국어대 교수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