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말말]황석영 (소설가) 저는 죽는 날까지 글을 쓰겠다, 현역 작가로 죽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전 『수인』을 쓰고 났더니 뭔가 다 끝난 것 같더라. 제가 1962년 『사상계』 신인상을 받았으니 등단 60년이 지났고, 여든이 넘었다. 청년 작가였는데, 뒷간에 잠깐 갔다 오니까 어느 새 인생이 휘딱 다 지나가 버렸다. 원로 작가라는 하나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원로 작가는 자신이 여태까지 쌓아올린 업적, 그것을 반복하는 매너리즘을 벗어나야 하는 책무가 있다. 말하자면, 원로 작가라는 건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과 똑같은데, 더 이
[말말말] 김도언 (시인ㆍ소설가) 2005년 당시 나는 대학로에 있는 샘터사의 북에디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피천득 선생님의 전담 편집자가 되었다. 선생님의 자택인 반포주공아파트를 수시로 드나들면서 피 선생님의 책을 만들었다.피천득 선생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모종의 마뜩한 자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피 선생님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이상과 같은 해(1910년)에 같은 도시(서울)에서 태어나셨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경도傾倒 같은 것이었다.피천득 선생님을 통해 나는 이상의 시대를 간접적으로나마 유사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같
[말말말]위근우 (대중문화 전문기자) 가장 쓸데없는 짓은 반성이다. 반성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이미 부정적 감정이 스스로에게 쏟아져 들어올 때 굳이 짐을 하나 더 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원고가 망한 이후 바로 떠오른 그 이유와 그에 대한 반성이라는 건 높은 확률로 옳지만 대단한 성찰은 아닐 것이다. 좀 더 좋은 글감을 미리 찾지 못해서, 글의 방향이 정해지기 전에 좀 더 사전조사를 하지 않아서, 등등등. 맞는 얘기지만 다음에 안 그러면 되는 일일 뿐이다. 반성은 언젠가 해야 하지만, 자괴감에 빠졌을 때의 반성이란 사고의 진전
[말말말]추성은 (시인) 일본에는 ‘언령(言靈)’을 믿는 신앙이 있다고 한다. 말 안에 담기는 영력, 즉 말이 가지는 힘을 믿는다.단순히 어떤 관념이 언어로 빚어지는 것뿐인데 그 언어에 힘이 있다니! 문학과 닮아있지 않은가.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도 언어가 갖는 힘을 암시한다.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쉽게 간과하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문학을 믿는다는 건 바로 각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구는 아주 희박한 힘
[책 속 한 문장] 내 꿈은 처음부터 오직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예닐곱 살 때 이미 그것을 알았고,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으리라는 허황한 생각에 빠진 적도 없었다.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쓰는 것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신들의 호의를 얻지 못하면(거기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 글만 써서는 입에 풀칠하기
[말말말] 최성현 (작가) 테톤 수족 인디언 추장 ‘서 있는 곰’은 말했다.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다.” 맞다. 세상은 크나큰 도서관이자, 나아가 한 권의 거대한 경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흔히 성경이나 불경이나 사서삼경 따위를 최고의 책인 줄 아는데, 아니다. 역시 가장 귀한 책은 천지만물이다. 그보다 나은 책을 우리는 가질 수 없다.- 최성현 에세이집 '무정설법, 자연이 쓴 경전을 읽다', 판미동, 2024, 9면
[말말말]정영욱 (에세이스트)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는 고무줄과 같아서 끊어지지 않는 한 탄성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언제부터인가 이완된 사이가 다시 수축하기도 하고, 그러다 또 가까워졌을 때 축적한 힘을 받아 이완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나에게 사랑의 성숙이란 ‘촘촘히’가 아닌 ‘틈틈이’이며, 사랑의 완성이란 그 순환을 이해하는 것이다.- 정영욱 에세이집 , 놀, 2024, '성숙한 사랑. 완벽한 사랑' 중에서
[말말말] 송종원 (『창작과비평』 편집위원 · 문학평론가) 창비시선이 출간된 지 49년이 지났고, 그사이 500권에 이르는 시집이 세상에 나왔다. 숫자의 규모가 어떤 인상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 오랜 시간의 의미가 온전히 파악되기를 기대하기란 당연히 어렵다. 한권의 시집이 담아낸 고유의 시간은 시인 한 사람의 시간을 초과한다. 시의 언어에는 시인 육체의 생물학적 시간을 넘어선 무언가가 들어 있는데, 창비에서 발간된 시집이라면 그것을 이 땅의 역사라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때 역사는 연대기적 시간과는 거리가 있
[책 속 한 문장] 예술이 할 수 없는 일은 너무나 많다. 죽은 이를 도로 살릴 수도 없고, 친구들 사이의 다툼을 말려주지도 못한다. 에이즈를 치료하지도 못하며, 기후변화의 속도를 늦추지도 못한다. 그렇기는 해도 예술은 아주 비상한 기능을 한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어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을 중재하는 기묘한 능력이다. 그것은 친밀성을 창조하는 능력이 분명 있다. 모든 상처에 치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모든 흉터가 추한 것은 아니다. 예술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줌으로써 상처를 치유한다.내
[말말말]방민호 (작가ㆍ문학평론가ㆍ서울대 교수) 한국사회의 복잡한 내부 정치적 상황으로 말미암아 북한 사회의 실정에 관한 비판적 언급은 금기시되어 있지만, 문학이 이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은 세계문학사의 맥락, 전통에 비추어 실천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비지성적이다. 한국문학 장은 지금 비지성적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탈북문학은 지금 한국문학의 세계적 동시대성의 한 시금석이라 할 만하다.- 탈북작가 공동 창작집 '당신은 어디 있나요?', 예옥, 2024, 작품 해설 중에서
[말말말]장석주 (작가ㆍ문학평론가) 시집에 부쳐시집 『꿈속에서 우는 사람』에 깔린 주조음은 광장의 브라스밴드가 쿵짝쿵짝 흥겹게 연주하는 악기 소리다. 모란과 작약의 꽃이 피고, 민어가 올라오는 계절이 돌아오고, 여름방학을 맞은 소년들은 어디론가 달려간다. 젊은 어머니는 어두운 방에서 출산하느라 비명을 지르고, 소년은 언덕에서 먼 나라로 이민 간 친구를 그리워한다. 먼 곳을 향한 동경, 소년들의 선행, 새벽에 도착한 두부를 먹는 기쁨, 눈썹을 가늘게 그린 딸들이 꿈속에서 꿈을 꾸듯이 사는 모습, 하이네켄 맥주를 마시던 시절의 회고가
[말말말]양안다 (시인)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일. 인간이 비인간을 사랑하는 일. 인간이 비인간을 증오하는 일. 인간이 인간을 증오하고 인간이 스스로 마음을 폐기하는 일. 너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웃었다. 네 마음의 나무는 나보다 아름다운가보다. 아름답다는 건 더 많은 신비를 이해한다는 뜻. 너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상상하곤 했다.- 에세이집 '달걀은 닭의 미래', 난다, 2024, 34면
[말말말]최재봉 (문학전문 기자) 표절을 적발하고 단죄하는 것만이 능사일까. 아니 애초에 그것이 타당하거나 가능한 일일까. 앞서 마크 트웨인과 푸엔테스, 바르트 등의 주장에서 보다시피 완벽하게 독창적인 말이나 글은 가능하지 않다. 언어는 질서이며 약속이고, 우리는 그 매트릭스 안에서 말을 하고 글을 쓴다.- 평론집 '탐문,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비채, 2024, 125-126면
[말말말]정법안 (시인ㆍ출판인) 8090시절에는 문학은 꿈이자 힘이었다 그 속엔 시대의 저항 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문학은 어떤가 시인 소설가 수필가라는 타이틀은 한갓 개인의 소장품으로 전락했다 작품은 거의 상투적이고 개인적인 소품이고 서사가 없다 그러니 팔리겠는가 시집은 시인들끼리 돌려보는 수준이다 독자도 관심없다 서점에 가보면 한국문학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절망이다 문학출판을 과연 해야할까 고민이다 그래도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겠어 니라도 해야겠지 다시 소설책을 출간한다- 2024년 3월 25일 페이스북
[말말말]김혜순 (시인) 여성시인이 자신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 하면 할수록 그녀는 파멸한다. 여성시인이 된다는 것은 끝없이 파멸할 수도, 타락할 수도 있는 은총이다. 이 은총 속에서 그녀는 더이상 이곳에 존재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여성의 몸에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죽음에의 무한한 참여, 목적 없는 여행을 무한히 감행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여성시인의 내부에는 머뭇거리고, 비틀거리고, 남장을 한 채 멀어지는 한 여성이 존재하고, 영원 속에서 젖을 먹이는 한 어머니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말말말]심너울 (소설가) “날 때부터 마력이 없는 게 더 나았을 거예요. 그럼 괜히 아빠가 기대하지도 않았을 테고. 별 의미도 없는 사교육에 그렇게 올인할 이유도 없었고요. 저는 날개를 달고 태어난 우물 안의 개구리였어요. 날개가 없었으면 행복했을 텐데.”- 장편소설집 '갈아만든 천국', 래빗홀, 2024, 〈허무한 매혈기〉 67면
[김미옥의 종횡무진] ‘콜론타이 ’ 이야기 약에 취해 자다 깨니 사위가 캄캄하다.3월 8일은 ’여성의 날‘이었다.1910년 국제사회주의 여성 회의에서 콜론타이와 클라라 체트킨이 여성의 날을 제안했다.콜론타이는 소비에트 대표, 클라라 체트킨은 독일 대표였다. 러시아 혁명의 ‘붉은 장미’로 불렸던 콜론타이는 여성 해방이 경제적 독립에 있다고 생각했다. 귀족 가문 출신으로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한 사회주의자며 소설가였다.자식 양육과 가사 노동은 국가가 맡아야 하고 여성도 자유 연애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녀의 급진적인 생각은 남자
[말말말] 최진영 (소설가) 어떤 믿음에는 이기적인 구석이 있지. 너는 믿음에 깃든 이기심을 되새긴다. 당신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믿음은 오직 나를 위한 마음. 당신을 끝까지 믿는다는 말은 나를 절대 배반하지 말라는 요구. 그러므로 믿는 마음에는 이기심보다 큰 외로움이 숨어 있다. 먼저 떠나지 못한 사람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홀로 되삼키는 울음이 있다. 너는 남겨지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이곳까지 왔다. 믿지 않으려고 훌쩍 떠났다. - 소설집 '오로라', 위즈덤하우스, 2024, 23면
[말말말]장강명 (소설가) 현대문명은 점점 더 정교하고 복잡하고 자체적인 작동 원리를 지닌 기계가 되어간다. 우리는 생존과 안전에 대한 걱정을 더는 대가로 그 회색 기계 속 부품으로 살기를 선택했다. 변덕쟁이 신과 사나운 야생보다는 그편이 좀더 우리의 이치에 가까우리라 믿고.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다른 부품들 사이에 옴짝달싹 못한 채 서서, 이 무표정한 기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리자가 있기나 한 건지를 궁금해한다. 그러다 속으로 중얼거린다.‘그런데 이 기계는 늘 어딘가 고장이 나 있는 것 같아.’- 산문집 '미세 좌절의 시대',
[말말말]김도언 (시인ㆍ소설가) 문학이 꿈꾸는 세상과 정치가 꿈꾸는 세상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정치적 욕망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건 아름다운 것과 힘쎈 것을 구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및 감수성의 차이 같은 것 아닐까. 문학이 지도한 낭만적 관념에서는 힘쎈 것이 종종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니까.문학은 혁명에 관여하지 않고 혁명의 조짐에 관여한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하고.- 2024년 3월 15일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