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환 장편소설 『붉은 고래』 연재

[『붉은 고래』 1권 (10)]

 

《채송화》

어머니는 자전거 핸들에 매달린 우체부의 행낭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새 버릇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래도 당신의 가슴을 태우는 소식은 오지 않았다. 압록강 너머의 어느 마을에서든, 창망한 바다 저 너머 어느 귀퉁이에서든.

어머니의 타는 속은 시선의 방향에 따라 내용이 달라졌다. 기러기떼가 날아가는 북녘을 아득히 바라볼 때는 ‘밥이나 굶지 않는지 잘 살고 있는지’라는 근심과 함께 맏딸의 족두리 쓴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바닷가에 서서 먼 수평선을 쓸쓸히 응시할 때는 ‘죽었나 살았나’라는 애끓는 걱정과 함께 맑게 웃는 맏이의 얼굴이 눈앞을 막아섰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한 발로 땅바닥을 자근자근 밟을 때는 ‘무소식이 희소식이지’라는 체념이 부드러운 손바닥처럼 뜨끔거리는 눈두덩을 문질렀다.

해가 바뀌었다. 계절이 더 바뀌었다. 멀리 떠난 두 자식은 끈덕지게 무소식이었다. 마침내 허경욱의 왼쪽 가슴에 큼직한 손수건 하나가 매달리게 되었다. 우리 집 막내인 내가 학교에 들어간 것이었다. 코흘리개에게 교실은 새로운 세계였다. 더구나 선생님의 말씀을 복창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만큼 명랑한 세계였다.

그해 봄날의 하루였다. 어머니가 전쟁터에 나간 임 소식처럼 기다리는 편지는 결코 날아들 줄 모르던 어느 날이었다.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와 단발머리의 담임선생님이 꽃 이름 하나를 제목으로 삼아 동시를 한 편씩 지어오라는 숙제를 냈고, 나는 교실에서 「채송화」라는 동시를 발표했다. 길어야 여섯 행쯤 되었을 텐데, 회갑을 앞둔 지금의 내 머리엔 첫 두 행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그마저 땜질된 것인지 모르지만.

 

소복소복 햇빛 받는 채송화를 보면

자꾸자꾸 큰시야 굵은 눈이 생각나요.

 

내가 태어나서 혈육이 아닌 사람에게서 큰 칭찬을 받은 일은 그날 수업 시간이 처음이었고, 그것은 내 인생의 유년 시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으로 박히고 말았다. 예쁜 담임선생님은 섬섬옥수로 손수 나의 「채송화」를 칠판에다 하얗게 옮겨 적었고, 자신의 선창을 따라 다함께 한 행씩 한 행씩 따라 읊을 것을 명령했으며, 우리 반 모든 아이들에게 공책에 베껴 쓰도록 지시했다. 그런 다음엔 나에게 다가와 속닥속닥 몇 가지를 물었다. 조금도 까다로운 질문이 아니었다.

“큰시야의 눈이 굵은 모양이지?”

“예. 채송화하고 비슷합니다.”

“큰시야는 무슨 일을 하시나?”

“공부요. 책도 많이 읽고 술도 잘 마셔요.”

“경욱이는 좋겠네. 그런 큰시야가 있으니까 경욱이도 공부를 잘하겠다. 그런데 경욱이 동시를 읽어보면 큰시야가 지금은 집에 없구나. 그래서 보고 싶어하는구나.”

“예.”

여기쯤에서 그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큰시야가 집에 없어서 큰시야를 보고 싶어한다는 말씀에 내 가슴이 벌렁벌렁 슬픔을 쥐어짜고 있었으나 담임선생님은 눈치도 없이 기어코 철딱서니 없는 아이처럼 굴었다.

“경욱이 큰시야는 어디 갔는데?”

오, 그 달콤한 목소리. 마치 나의 큰형을 사모하는 여인이 나의 손에 연애편지를 쥐어주기 앞서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을 하소연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으아앙…….”

울음보가 터졌다. 한번 터진 나의 울음은 갈수록 서러워져서 대성통곡으로 자라나버렸다. 옆 반 선생님까지 달려왔지만 소용이 없었던 나의 지독한 울음은 땡땡 마침 종이 치고 나서야 가까스로 잦아들고 있었다. 이마의 진땀을 훔친 담임선생님은 큰형의 행방을 더 캐지 않았다. 아마 큰형이 죽은 것으로 짐작했을 텐데, 그것은 빗나간 판단이 아니었다. 정통으로 내 마음을 알아맞힌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속 태우는 무소식을 나는 벌써부터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까. 큰시야는 언제 오느냐고 물어도 모르겠다, 큰시야는 어디 있느냐고 물어도 모르겠다, 큰시야가 살아 있기는 살아 있느냐고 물어도 모르겠다. 큰시야에 관한 막내의 어떤 질문에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르겠다’는 한마디로 일관했기에 시나브로 그것들이 나의 가슴에 납덩이들로 쌓여 큰형의 시신에 버금갈 무게로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허경욱의 대성통곡 사건이 터지고 열흘이나 지난 토요일 한낮이었다. 점심때가 지나 어영부영 예배당 앞에 모여든 동네 꼬마들은 갑자기 어판장으로 달려가야 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 묻은 것을 어느 밝은 귀가 들었을까. 우리 중의 누군가가 느닷없이 “귀신고래가 잡혔단다.” 하는 소식을 내놓았다. 순간 나는 고막이 쩌릿했다. 가보자, 이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나는 뜀박질을 시작했다. 예배당에서 어판장까지, 그 이백 미터쯤 되는 거리를 우리는 도망치는 좀도둑처럼 단숨에 내달았다.

솔직히 나는 ‘고래의 귀신’이 잡혔다는 줄 알았다. ‘귀신고래’라는 이 특이한 이름을 ‘고래귀신’으로 알아듣고 사람의 귀신이 아니라 고래의 귀신이 잡혔다는 착각에 빠져 숨을 헐떡이는 내 눈앞엔 장대한 헛소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커멓게 불태운 언덕을 잘라내어 옮겨놓은 듯한 어마어마한 고래가 너무 얌전히 누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우리 꼬마들의 도착을 바란 것이었을까. 나의 호흡이 정상을 회복하자 곧바로 귀신고래를 처단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억세고 질긴 가죽 같은 느낌을 풍기는 고래의 피부색을 아주 짙은 남색이라 해야 할지, 남색을 섞은 검정색이라 해야 할지. 내가 색깔을 정하지 못해 망설이는 사이에 사닥다리 세 개가 그 언덕 같은 몸뚱이에 걸쳐지면서 길다란 칼을 둘러맨 세 사내가 등장했다. 대뜸 나의 시선을 끌어당긴 것은 중간의 사닥다리를 타고 오르는 사내의 특별하게 생긴 칼이었고, 나는 그것을 서슴없이 ‘관우의 칼’이라 생각했다. 그때까지 그림으로든 글로든 만난 적이 없었지만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 몰라도 긴 자루 끝에서 큼직한 반원의 시퍼런 서슬을 뽐내는 칼을 나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의 특별한 무기로 알고 있었다. ‘청룡 언월도’라는 이름까지는 까맣게 몰랐고.

관우의 칼은 무시무시한 피의 칼이었다. 큼직한 반원의 칼날이 귀신고래의 옆구리를 쓰윽 한번 스칠 때마다 울컥울컥 토하는 듯한 붉은 피가 쏟아져내리고 내 몸으론 후룩후룩 한기가 끼쳐 들었다. 한기는 사람의 눈을 데운단 말인가. 나는 자꾸만 눈물을 맺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웃고 떠드는 소란마저 기괴한 고래의 울음소리 같았다. 아니, 내 귀가 스스로 기괴한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불과 몇 초 동안이었을까. 나는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막았다. 나의 시각과 청각이 다시 현실의 세계로 열렸을 때, 내 앞에는 이미 놀라운 사태가 펼쳐져 있었다. 고래의 귀신이 아니었던 귀신고래가 피의 고래로 둔갑한 것이었다. 짙은 남색도 아닌, 남색 섞인 검정색도 아닌 귀신고래는 웃고 떠드는 소란스런 인간의 세상으로 끌려들어와 드디어 피 흘릴 줄밖에 모르는 붉은 고래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나는 더 지켜볼 수가 없었다. 허경욱의 온몸이 귀신고래의 붉은 피로 범벅되면서 조그만 아이가 자꾸자꾸 팽창해 귀신고래처럼 장대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피의 고래로 변신한 귀신고래의 거대한 붉은 몸이 자꾸자꾸 축소돼 허경욱처럼 왜소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바들바들 다리가 떨려 나는 간신히 몸을 돌렸다.

바로 이튿날 아침이었다. 우리 집 대문 안으로 일편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일요일이었으니 우체부가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속을 숯가마로 만든 큰누나나 큰형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허경철, 나의 사촌 형님, 큰형의 동지. 그 사람의 소식이었다. 괴청년들에게 납치되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소문만 남기고 며칠째 자취를 보이지 않던 그이가 그예 송도해수욕장 백사장에 나타났다니, 보나마나 그것은 부음이었다.

먹다 만 아침상을 물린 아버지를 데려가는 동네 사람들의 꽁무니에 나는 작은형과 같이 따라붙었다. 항구로 드는 맑은 샛강의 다리를 건너, 양편에 백양나무들이 늘어선 길을 숨가쁘게 달려갔더니, 사람들이 웅성웅성 에워싼 바닷가 젖은 모래톱에 널브러져 있었다. 굵은 밧줄에 발목을 묶인 시체가. 사람을 쳐서 죽이고 발에 돌을 매달아 수장시켰다는 사실을, 몰라보게 흉해진 시체의 그 밧줄이 웅변하고 있었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포말이 밧줄의 끝자락까지 기어올랐던가. 나는 기억이 없다. 파도 소리조차 듣지 못했던 것 같다.

허경철, 그 사람은 큰어머니의 오열과 통곡 앞에서 자기 육신을 한 줌의 재로 남기는 연기를 따라 훠이훠이 하늘나라로 사라져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그래 경민아, 일찌감치 도망 잘 갔다.” 하면서.

사촌 큰형, 우리 집안의 종손이 한 줌의 뼛가루로 영일만 바다에 뿌려진 저녁이었다. 제복 입은 자형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 귀띔을 했다.

“저도 큰처남한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충고를 최근에만 두 번이나 했어요.”

반공 청년단의 손에 허망하게 생을 마친 허경철의 장례를 마친 다음 날 늦은 오후였다. 혼자서 부두까지 나갔다가 돌멩이를 차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우연히 빨간 채송화를 보았다. 우리 집 앞 교회 담벼락 밑의 그늘진 자리에 숨어서 늦게 핀 채송화 꽃송이들은 한결같이 빨갛게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아, 사촌 큰형의 눈망울도 큰형처럼 채송화를 닮았단 말인가. 동시 짓기 숙제를 떠올리는 내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면서 별안간 내 몸의 혈액을 응고시킬 듯한 한기가 오싹오싹 뼈마디로 파고들었다. 사나흘 전에 귀신고래의 붉은 피를 보면서 겪었던 그 한기와 흡사한 것이었다.

그렇게 허경욱은 창졸간에 앓아누웠다. 대엿새에 걸쳐 심심풀이 장난치듯 죽음의 냄새를 끼치곤 하던 고열이 가까스로 미열로 가라앉자, 이번엔 엉덩이에 뿔이 나듯 몹쓸 종기가 치솟았다. 드러누워 있다가 일어서지 못한 상태에서 드러눕지도 못한 채 곧바로 엎드려 있어야 했던 아이, 세명 의원이 주사로 열을 내려준 다음에도 또다시 한 달 가까이 날마다 그분 앞에 엉덩이를 내밀어야 했던 아이. 세명 의원의 말씀으로는 몸 안의 나쁜 기운이 엉덩이로 몰리지 않고 머리나 가슴으로 몰렸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아이, 부모님의 말씀으로는 못 볼 것(허경철의 흉한 시체)을 보아서 너무 심한 충격을 받아 진을 다 빼앗겼다는 아이. 내리 한 달 넘게 결석을 했던 아이는 어버이의 뜻에 따라 학교를 한 해 쉬어야 했다.

세명 의원의 말씀도 부모님의 말씀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지만 가끔씩 동공에 달라붙는 빨간 채송화 한 송이를 그 뭉개진 얼굴의 눈동자처럼 지켜보아야 했던 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쌩쌩 뛰어다닐 수 있게 되었을 때, 서울에는 전쟁이 터졌다고 했다.

 

《바람 드센 밤》

코펜하겐이 저물고 있었다. 시우가 교수와의 약속을 지키러 영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조카의 만류를 뿌리친 나는 기어이 공항 가는 버스에 동승했다. 조카가 버스에 앉아 갸웃거렸다. 삼촌은 큰아버지가 그런 방법으로 탈출한 사실을 공안 당국이 끝까지 몰랐다는 것에 왜 큰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나는 짧게 답했다. 고소해서 그런다고. 허나 뒷맛이 허전하여 덧붙이고 말았다.

“큰형이 일본으로 탈출하기 전에 우리 집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는 것, 대마도까지 데려다줄 어선을 사촌 형님의 조직이 마련했다는 것, 경찰인 자형이 큰형을 자기 집에 숨겨주고 탈출을 도왔다는 것. 이런 일들을 그들에게 들키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에 내려앉은 미세한 먼지 한 점보다 못하다. 그런데 만약 들켰더라면 끔찍한 비극이 덮쳤을 거다. 아버지, 어머니, 사촌 형님, 자형, 누님, 이 모든 가족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테고, 우리 집안은 이미 그 시점에서 쑥대밭이 되고 말았을 거야. 그러니 그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비밀이었겠어?”

이런 다음, 나는 빠뜨렸던 한 가지를 더 보탰다.

“해방된 그해 가을에 큰형이 휴가 나온 병사처럼 집에서 보내고 있었던 기간이었다. 당시에는 양조장이나 정미소를 가진 사람들이 흔히 시골 부자로 꼽혔는데, 양조장에다 정치망 어장까지 거느린 집안에서 큰형을 사위로 삼고 싶다는 청혼이 들어왔으니, 우리 집에선 특히 어머니가 놓치고 싶지 않은 혼처였다. 어머니는 ‘장가를 들면 정처 없는 떠돌이 같은 생활’을 청산할 것이란 기대감까지 덧붙인 집착이었다. 또 큰형 자신이 그런 어머니를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단박에 거절하지 않고 며칠 생각해보겠다며 어중간하게 나왔으니까. 아마 큰형은 상대에 대한 예의를 차린다는 뜻을 담았을 테고, 어머니는 그것을 가능성 쪽으로 읽었을 것이고.”

공항 가는 길의 풍경 감상을 숫제 포기한 시우가 칭찬을 했다.

“삼촌, 채송화가 감동적이었어요. 시인이 되지 그랬어요.”

나는 껄껄 웃었다.

“시? 나도 썼다. 이야기 속에선 초등학생밖에 안 됐으니, 내 시를 말할 시간은 많이 멀었지. 요즈음 어쩌다가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 친구들 중에 ‘채송화’를 기억하는 놈은 하나도 없고 더러 ‘대성통곡’을 기억하는 놈들이 있더라. 그러면서 이렇게 놀리지.

 

야, 경욱이 너 그때 진짜로 오지게 울었다. 엄마나 아버지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는 안 울었지?

 

이럴 때, 나는 그저 웃고만 있는다. 속이 쓰라린 것을 들키기 싫거든.”

“왜 속이 아프죠, 까마득한 추억인데?”

시우가 눈을 깜박였다. 조카의 짙은 눈썹을 보며 나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일렀다.

“아버지, 어머니의 죽음이 생각나서 그런 거지. 아버지 부음을 나는 듣지도 못한 아들이었다. 그러니 돌아가신 줄도 몰랐지. 무덤에 가서 울었다. 아주 슬피 울었다. 그래도 대성통곡은 아니었고, 조용히, 모질도록 조용히 울었다. 어머니 임종은 우리 삼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내가 지켰는데, 어머니가 숨 거두는 머리맡에서 나는 세 번 눈물을 흘렸다. 큰형 몫으로 한 번, 작은형 몫으로 한 번, 내 몫으로 한 번. 이번에도 대성통곡은 안 했고. 미수米壽에 이른 평안한 죽음을 문상객들이 호상이라 했고, 나 역시 어머니는 대지의 품으로 돌아갈 시간을 맞아 대지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둡고 추운 우리의 구체적인 20세기가 또 하나 사라졌다는 쓸쓸함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시우와 나는 닷새 뒤 오후 5시에 오스트리아 빈의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닷새 동안을 혼자서 외롭게 떠돌아야 할 처지에서 외톨이 된 첫날,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시내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머리 위의 빠끔한 전등을 켜고 작은 지도를 펼쳐 유레일패스로 갈 수 있는 철길과 뱃길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그래서 코펜하겐에서 하룻밤 묵으려 했던 애초 계획을 취소하고 공짜 뱃길을 눈에 넣었다. 코펜하겐에서 배를 타고 스웨덴 땅으로 건너가, 버스로 갈아타고 말뫼란 도시에 가서, 심야의 배로 이튿날 이른 아침에 독일 땅 사스니츠란 항구에 내리는 길.

고독과 객수. 오랜만에 이것을 만끽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드니 부질없는 우수에 젖은 젊은이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사실 나의 인생에서 고독과 객수는 절친하고 만만한 친구였다. 고독을 까탈 모르는 영혼의 벗으로 삼을 수 없었다면 , 마셔도 마셔도 바닥나지 않는 훌륭한 술처럼 객수를 마실 수 없었다면, 아마 나는 기나긴 감옥살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마치 축사에 갇힌 황소가 동족의 뼛가루 섞은 사료를 얻어먹고 미쳐버리는 것처럼 나 역시 그렇게 실성하지 않았으려나.

외톨이 된 나는 고독과 객수를 동행자로 데리고 있어서 오히려 고독하지 않을 듯했고 나그네의 설움을 맛보지 않을 듯했다. 아주 씩씩하게 여객선 터미널을 찾아갔다. 코펜하겐을 출발해 스웨덴에 닿는 뱃길은 고작 십오 분쯤 걸린다고 했다. 배 안에서 만난 좀 특이한 풍경은 착하게 생긴 스웨덴 청년들이 패거리마다 여러 상자의 맥주를 챙기고 있었다는 점인데, 물어보진 않았으나 내 짐작에는 스웨덴에선 술값이 비싸니까 배를 타고 잠깐 코펜하겐으로 건너와 술을 한꺼번에 왕창 구입해 가는 모양이었다.

어둠이 깔린 스웨덴 거리에서도 나의 어설픈 영어가 막히지 않아 말뫼 가는 버스를 쉽게 받아 탈 수 있었다. 그것도 유레일패스만 보이면 방금 내린 여객선처럼 공짜로 태워주는 버스를. 말뫼에 내리자 축축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바람을 헤치며 이정표 따라 선착장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나의 마음이 별안간 가로수 가지처럼 흔들렸다. 배가 뜬다 하더라도 이 바람에 위험하지 않겠나, 하는 염려가 뱃길을 포기하는 쪽이 현명하지 않겠나, 하는 유혹을 낳은 것이었다.

단순한 뱃멀미 걱정이 아니었다. 진짜로 배가 전복되는 사태를 상상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타관 바다에 물귀신이 되는 장면을 악몽처럼 그려보는 나의 눈앞에 언뜻 빨간 채송화가 피었다 스러졌다. 등골이 오싹했다. 바닷가 젖은 백사장에 흉한 시체로 널브러져 있었던 허경철, 연기로 사라진 사촌 형님을 슬퍼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의 눈길을 끌었던 채송화, 나의 영혼에 압정처럼 박힌 그 빨갛게 어여쁜 꽃송이가 냉큼 소름을 끼치고 사라져버렸다.

대합실 의자에 배낭을 내려놓은 다음에야 싱거운 웃음이 나왔다. 나의 케케묵은 버릇을 자책하는 것이었다. 나에겐 소년기부터 회갑의 언덕에 거의 올라선 오늘날까지 따라붙은 고약한 버릇이 있다. 지푸라기 같은 빌미를 잡고 그것이 초래할 극단적 상황을 제멋대로 그려보는 짓. 그런 황당한 상상은 곧잘 나를 끔찍스런 비극의 공간으로 옮겨놓기도 하고 영광스런 상찬의 자리에 올려놓기도 했다. 제대로 맞아떨어진 적이 없었지만 나의 머리는 늙어가면서도 그 야릇한 작동을 멈출 줄 몰랐다.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조금 놀랐다. 이층으로 짜인 넓은 공간이 텅 빈 때문이었다. 직사각형 강당처럼 넓은 공간에 전등들만 덩그렇게 켜졌을 뿐, 승선을 기다리는 손님이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고, 모든 실내 매점의 문이 닫혀 있었다. 이게 무슨 조화냐, 강풍에 배가 취소되었는가. 나는 벽에 붙은 출항 안내판을 세심히 살펴보았다. ‘취소’란 단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정을 넘으면 북해를 건너 사스니츠로 가는 배가 출발한다고 되어 있었다. 나는 시계를 보았다. 겨우 10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출항 시간이 멀어서 이렇구나. 중대한 깨우침을 얻은 경우처럼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아까 겪었던 상상의 두려움을 깨끗이 벗고 있었다.

되찾은 평상심이 오줌보의 무게를 느끼게 했다. 나는 의자에 배낭을 두고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 앞 네모반듯한 거울에 얼굴을 비춰 간지러운 눈을 살피고 있는데, 불현듯 그저께 고흐 미술관에서 겪었던 일이 나타났다.

고흐 미술관의 맨 마지막 자리를 지키는 작품 앞에 서서 나는 극렬한 고통에 휩싸였다. 고흐를 기리는 공간에는 그의 생의 최후를 암시하듯 그 자리를 ‘뿌리째 뽑혀 쓰러져 누운 나무’에 맡기고 있었다. 왜 나의 가슴은 그 앞에서 나무뿌리처럼 갈가리 찢어졌을까? 모름지기 그것이 나의 인생을 보여주는 듯했기 때문이다. 붐비는 관람객들 틈에서 나는 이어폰에 나오는 일본어로 그 작품의 해설을 들었다.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그토록 발버둥쳤지만 끝내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고흐의 인생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했다. 나는 그만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조카는 곁에 있지, 설사를 만난 사람처럼 후닥닥 화장실로 달려가 좌변기 위에 엎어진 나는 청승맞게 눈물을 쏟아냈다. 인간의 영혼을 물성物性으로 표현한 예술가의 위대성이 허경욱이란 초로의 인간을 통렬히 울린 순간이었다. 화장실을 나서기 앞서 나는 세면대 앞 거울을 들여다보며 차근차근 눈물 자국을 지웠다. 그때야 비로소 고흐는 내 안에서 정당한 화가로 거듭나고 있었다. ‘아우에게 절절한 편지’를 쓴 화가가 아니라 작품으로 한 인간을 통곡시킨 최상의 화가로.

밤 11시를 지난 썰렁한 대합실에 승객이 나타났다. 단 두 사람. 최소한 나보다 서른 살은 아래로 보이는 백인 남자와 여자. 연인인지 부부인지 모를 한 쌍을 나는 힐끔힐끔 던지는 곁눈질이었지만 야릇한 동물이 등장한 것처럼 유심히 살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의자를 무시했다. 출입문 곁의 벽에 두 겹으로 붙어 서서 바닥에 배낭을 내리고 맞은편 벽의 출항 안내판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곧바로 사내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여자는 위를 올려다보는 자세를 잡았다. 그들은 말도 무시했다.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동작까지 무시했다. 눈과 눈 사이에 키 차이의 간격을 유지한 채 딱딱히 굳어져서 얼굴 마주보기에 몰두했다. 손은 그저 그 자세를 지탱하는 받침대로서, 큼직한 손은 약간 뒤로 휘어진 연한 등뼈에, 보드라운 손은 듬직한 허리에 고정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오직 눈빛만 소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십여 분을 훔쳐보고 있던 내가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저렇게 응시만 하고 있을 수 있다니. 눈동자만으로도 사랑하는 이의 전 존재를 남김 없이 자기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단 말인가. 아, 어쩌면 저렇게 우아한 열애의 조각상으로 굳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무례할 만큼 노골적으로 지켜보았다. 하긴 나의 시선은 방해도 결례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정작 그들은 상대의 눈빛 이외엔 다른 어떤 것도 의식할 수 없을 테니까, 눈동자를 통해 사랑하는 이의 모든 것을 깡그리 자기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전 우주를 차지해버렸을 테니까.

최소한 삼십 분은 지난 다음이었다, 사내의 수그린 고개와 여자의 젖힌 고개가 똑바로 세워진 것은. 비로소 나는 생김새를 살필 수 있었다.

유럽인의 얼굴을 보고 혈통을 구별할 능력이 없지만, 사내의 우악스럽고 거칠고 큼직한 얼굴은 슬라브 피를 받은 것 같았다. 근거는 내 기억의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사진. 사내의 얼굴은 책에서 보았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흑백사진을 연상시켰다. 톨스토이의 얼굴이 도스토예프스키 같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얼굴이 톨스토이 같은 나의 눈에 사내의 얼굴은 두 작가의 사진을 겹쳐보게 했다.

이제 볼을 얌전히 사내의 왼쪽 젖가슴에 기댄 여자, 그녀는 <레드>‧<화이트>‧<블루>라는 시리즈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여우의 얼굴을 연상시켰다. 다만 키가 작아 보였다. 아니, 나의 착시일 수 있었다. 사내의 키가 그 시리즈 영화의 남우보다 훨씬 크기에 그녀의 키를 실제보다 작다고 느꼈는지 모르니까.

여전히 그들은 의자를 무시하고 있었다. 말도 무시하고 있었다. 고정돼 있던 눈빛이 헤어진 대신에 조그만 동작을 회복하고 있었다.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 여자는 자세를 바꿔 사내의 가슴에 뒤통수를 붙인 조각상으로 있었고, 다만 남자의 길다란 손가락이 섬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렇게 길다란 손가락이 저렇게 섬세히 움직일 수 있다니.’

나는 또 감복을 했다. 그의 손가락은 잠시도 여자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잠시도 쉬지 않았다. 앙증맞은 볼을 마치 보드라운 화장솔로 터치하듯 문지르다 귓바퀴를 매만지고 목덜미를 포근히 감싸주다 이마와 정수리를 쓰다듬고……. 이런 동작을 하염없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한결같이 섬세하고 한결같이 감미롭게. 여자의 머리칼 한 올마저 애정의 현으로 연주할 줄 아는 사내. 그랬다. 그것은 이제 갓 천상에서 내려온 고단한 천사를 품에 넣은 사내의 더할 나위 없이 극진하고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한 애무였다.

동일한 시간대의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할 수도 있는 사내에 대해 나는 섣부른 상상을 펼치고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는 차르시대 말기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시인 푸슈킨이 연루되었던 데카브리스트의 맹원으로 시베리아 유형을 다녀왔는지 모른다. 할아버지는 레닌을 추종하다가 그의 급서 직후에 트로츠키를 반대하고 스탈린에 복무한 당원이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스탈린과 흐르시초프시대를 평범한 학자로 연명하다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엔 노구를 이끌고 스탈린체제를 비판했는지 모른다. 저 사내는 4대 만에 최초로 이성과의 뜨거운 사랑에 온전하게 눈을 떴는지 모른다. 그렇다. 저들은 신혼여행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가슴에 끓어오르는 사랑을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다 고스란히 쏟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나섰을 것이다.

오랜 습벽이 또 도진, 터무니없을 수 있는 나의 상상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어느 결에 나는 헌사를 바치고 있었다. 저 사내는 유산도 지식도 많을 것이다. 저 여자는 지참금도 지식도 많을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그들은 부유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부유해도 인간이 혼자서는 견딜 수 없다는 사실, 인간이 지상에 존재하는 한은 그의 영혼에서 사랑하는 힘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 사랑이 이성을 향한 것이든 이웃과 세계를 향한 것이든 인간이 사랑을 발휘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넘쳐나는 물질적 풍요에 갇혀 있어도 어느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래서 사랑하지 않는 인간은 결국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텅 빈 이국의 여객선 대합실에 이르러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끝까지 의자를 무시할 모양이었다. 자정이 한참 지난 뒤에도 여자는 사내의 왼쪽 가슴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었고, 사내는 길다란 손가락으로 섬세하고 감미롭게 여자의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말을 무시할 모양이었다. 사내도 여자도 입술을 꼼지락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끝내 성감대를 자극하는 애무도 무시할 모양이었다. 자신의 배꼽 위에 얌전히 포개어진 여자의 두 손은 그 자리를 떠날 줄 몰랐고, 사내는 도무지 여자의 젖가슴을 쓰다듬을 줄 몰랐다.

어떻게 생겨먹은 선박인지 몰라도 출항을 삼십 분이나 지연시키고 있었다. 대합실의 안내판에 찍힌 출항 시간과 내가 지참한 유레일 시간표에 나온 출항 시간이 일치되니 뱃고동 울리는 것이 늦어지는 사정은 틀림없이 강풍과 관련될 것이었다. 내가 그런 짐작을 하고 나서 다시 삼십 분이 더 흘렀다. 출항이 무려 한 시간 넘게 지연되었다. 그래도 안내 방송이 나오지 않았다. 대합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름지기 사랑을 탐닉하는 한 쌍의 사내와 여자, 그리고 외로운 나그네에 불과한 초로의 동양인 하나, 겨우 이 셋을 위한 친절은 쓸데없는 낭비로 치부하는지.

오, 맙소사. 그러나 허경욱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밤, 지루함과 따분함의 티끌도 얼씬거리지 않는 밤, 신선한 감동을 경험하는 밤이었다. 새벽 한 시 삼십 분에 접어들어도 도무지 지치지 않는 사랑의 연주자! 여자는 사내의 가슴에 뒤통수를 맡긴 채 그대로 죽기를 소원하듯 꼼짝하지 않고, 길다란 손가락은 예쁜 얼굴을 한결같이 섬세하게 한결같이 감미롭게 만지작거리고……. 한 사내와 한 여자가 저토록 고결한 애무로 자신의 사랑을 깡그리 표현할 수도 있구나.

그들은 끝까지 의자를 무시했고 말을 무시했고 사내의 한 손을 제외한 다른 모든 동작을 무시했다. 텅 비고 환하고 넓고 고요한 대합실이 오직 그들을 위한 사랑의 무대로 차려진 심야, 그들을 위한 배려처럼 배는 정한 시각을 두 시간이나 넘겨 칠흑의 바다 위로 입항의 지친 뱃고동을 울렸다.

컨테이너들을 차례차례 집어삼키는 거대한 배의 텅 빈 선실에 혼자 박혀 사랑에 대해 사색하는 나의 머리에 축구공이 떠올랐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모든 진정한 사랑을 하나의 축구공에 비유하자면, 사랑은 그 내부를 탱탱하게 채우는 공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것은 상대를 존중하고 아끼는 정신, 상대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 정열과 연민, 동경과 희열, 이 모든 것의 혼합으로 이루어진다. 마치 공기에 산소와 질소와 수소를 비롯한 온갖 것이 혼연일체로 뒤섞여 있는 것처럼. 그러나 시간이 물같이 흐르는 동안에 그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았을 때, 어느 하나라도 모자라거나 사라졌을 때, 사랑의 축구공은 가시에 찔려 틈이 생긴 것처럼 찌그러지고 결국엔 공으로서의 품위를 잃기도 하고 생명을 상실하기도 한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는 말이 통속의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긴 하지만, 이를 사랑의 본능에는 소유욕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사랑의 정체성을 모르는 심각한 어리석음이다.

힘찬 출항의 뱃고동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빌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닮은 사내와 스크린에서 보았던 여우를 닮은 여자의 사랑이 길이 지속되기를. 그들의 축구공에선 부디 공기의 어느 요소 하나라도 새지 않게 되기를. 내 기억에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을 그 지극하고 애틋하고 황홀한 애무의 조각상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기를.

 

《오붓한 피난》

북해를 건너는 심야로부터 내리 닷새를 조카와 헤어져 있었으므로 시우에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도 그만큼 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노트에선 그와 반대로 속도를 더 올리며 훌쩍훌쩍 건너뛰어 ‘허경욱의 6‧25’를 겪는 어린 시절에서 ‘허경욱의 4‧19’를 체험하는 고1까지 성장해버릴 계획인데, 이십여 년은 빈에서 시우와 다시 만나 하룻밤에 죄다 들려줬던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피난길에 나섰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이 피난길에 나섰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허리에서 전면전이 발발한다. 이 동족상잔은 명칭이 여럿이다. 미국을 위시한 여러 외국은 일반적으로 ‘한국전쟁’이라 하고, 북에선 ‘해방전쟁’이라 규정하고, 남에선 흔히 ‘6‧25전쟁’ ‘6‧25동란’으로 통한다.

‘한국전쟁’을 물고늘어졌던 미국인 학자 중에는 일제식민지시대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이 끝내 좌우로 분리되어 있었던 사실을 한국전쟁의 한 기원으로 판명한 시각도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합당한 일면이 있긴 하지만, 해방 직후의 분단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을 우리 민족 내부의 사정으로 돌리게 만드는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 냉전체제를 구상하는 미국의 전략적 선택, 소련과의 타협적 선택이 강제했던 한반도 분단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평양 정권은 ‘미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남한 해방과 그를 통한 자본주의 철폐 및 계급해방 실현’이란 목표를 명분으로 내세웠으니까 당연히 ‘해방전쟁’으로 규정했겠지. 그런데 남쪽은 어떤가 ? 6월 25일에 전쟁이 터졌으니까 ‘6‧25전쟁’이며 ‘6‧25동란’이란 식이다. 남쪽은 전쟁의 성격을 상징할 만한 이름을 붙이지 못한 셈이다. 북쪽과의 대칭적 자리를 고수한다면 가령 ‘자유수호전쟁’이라 명명할 수 있겠다. ‘공산당의 침략을 물리치고 자유를 수호한 전쟁이 6‧25동란이었다’고 학교에서 가르쳐왔으니.

해방전쟁이라 우기든 자유수호전쟁이라 맞서든 형언할 수 없는 민족적 비극과 역사적 퇴보를 남긴 동족상잔이, 고열‧종기와의 싸움을 힘겹게 이겨낸 어린 허경욱에겐 몇 가지 단편적 이미지로 새겨지게 되었다.

달포가 훨씬 지나도록 흉흉한 소문과 뉴스로 존재해온 전쟁이 마침내 우리 동네에 들이닥친 것은 늦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는 날이었다. 포항경찰서에 소속된 자형이 아침에 헐레벌떡 우리 집으로 달려와 자기 식구들은 알아서 조치할 테니 당장이라도 피난을 가는 게 좋겠다고 알려줬다. 수박과 참외를 거두고 나서 무씨와 배추씨를 뿌려둔 집 뒤의 너른 밭에는 이제 막 햇빛으로 나온 아기 손톱만한 여린 떡잎들이 파슬파슬한 땅을 파릇파릇 물들이고 있었고, 학교 근처의 복숭아 과수원에는 복숭아들이 부끄럼 타는 아이의 볼처럼 탐스레 익어 있었다. 건강이 좋아졌으나 남은 한 해의 여러 달을 빈둥빈둥 까먹으며 몸을 가꿔야 했던 나는 실상 며칠째 부엌의 생선을 탐내는 도둑고양이 같은 눈으로 그것들을 노리고 있었다. 피난을 떠나야 한다는 소리를 들은 내가 아쉬움을 삼키는 표정부터 지었던 까닭은 순전히 발갛게 물드는 복숭아 때문이었다.

우리 집보다 며칠 앞서 부산에 사는 친척집으로 떠난 집이 하나 있었다고 하지만, 우리 집은 온 동네가 피난길에 나서야 한다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 경찰 사위의 권고에 따라 피난 보따리를 싼다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귀가 있었다면, 보나마나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인민군의 진입을 기다리는 빨갱이였을 것이다.

사위의 전갈을 받은 아버지가 즉시 뛰어간 곳은 운송업 하는 육촌 친척이었다. 미리 언약했던 대로 고물 트럭 한 대에 그 집과 우리 집, 가까운 이웃집, 모두 세 집 피난 살림을 싣기로 거듭 확약받은 아버지는 돌아오는 길에 바둑 맞수를 찾아갔다. 피난 보따리가 아니라 아예 이삿짐을 꾸려둔 세명 선생은 허연 머리를 쓰다듬으며 여행 떠나는 늙은이와 같은 범상한 말씨로 털어놓았다. 어차피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가야 하는 마당에 아예 고향 땅 동래로 돌아가서 우글우글 끓고 있을 피난민들의 뒷바라지나 열심히 하다가 이 몹쓸 세상과 하직해야 하겠다는 계획을. 언제나 인술을 앞세우고 살아온 그분의 인품을 익히 아는 아버지는 차마 피난길에 동행하자는 뜻을 꺼낼 수가 없었다. ‘우글우글 끓고 있을 피난민들의 뒷바라지’라는 그분의 숭고한 말씀이 아버지의 눈물을 불러냈으며, 그것이 쓰디쓴 작별의 인사였다.(허경민과 허경욱에겐 생명의 은인과 진배없는 세명 선생은 인민군이 북으로 패주하고 나서, 뒷정리를 하러 포항에 왔다가 사흘을 우리 집에 묵은 적 있었다.)

이른 점심을 챙겨먹기 바쁘게 곧바로 동네와 멀어지고 있는 허경욱에게 피난길은 흥겨운 소풍이었다. 트럭 짐칸에 쌓아올린 피난보따리 꼭대기에 조무래기들과 함께 앉아 있었으니까. 시내 중심가를 벗어나 염전과 갈대밭과 늪과 논으로 이루어진 지대로 접어들자 우리 트럭 앞에는 벌써 피난 행렬이 길다랗게 늘어져 있었다. 잡동사니를 가득 실은 소달구지, 큼직한 보따리 얹은 지게를 진 아저씨들, 머리에 짐을 인 아주머니들, 어깨에 책보자기보다 몇 배나 굵은 보자기를 맨 아이들, 더러는 지게 위에 앉은 꼬마들……. 우리 트럭은 속력을 내지 못하고 비틀비틀 소달구지처럼 기어가야 했다. 신작로를 만나야 자전거 속력이라도 낼 수 있을 텐데. 나는 망루처럼 높은 곳에 편안히 앉아서 복닥대는 좁은 길을 탓하고 있었다.

형산강 다리를 건너야 하는 길목에 이르러 나는 보았다. 새까만 흑인 병사 떼거리를. 배를 타고 와서 송도해수욕장에 상륙했는지, 트럭을 타고 와서 형산강 다리 밑에 내렸는지. 수백 명의 흑인들이 열을 지어 형산강 둑을 따라 상류 방향(경주 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필경 흑인 병사 무리를 처음 발견한 나의 착시였을 테지만, 백인 병사도 섞여 있었을 그 행군 부대의 모두를 나는 흑인으로 보고 있었다. 무슨 놈의 껌을 닭다리 뜯어먹듯 씹어대는가 몰라도 몇몇 흑인 병사의 질겅질겅 씹어대는 입술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허연 이빨을 신기한 현상처럼 지켜보고 있자니, 장총을 앞세운 두 백인 병사가 멈춰선 우리 트럭을 둘러보고 있었다. 수상한 자를 숨기진 않았나, 무기를 숨기진 않았나. 대충 그런 의심의 눈초리였다.

백인 병사의 손길이 우리 트럭에 통과 신호를 보내자 꼭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지 별안간 천둥 같은 대포 소리가 터졌다. 이 정황은 틀림없다. 트럭 앞을 지키는 백인 병사의 손에서 통과의 동작이 나오기를 지켜보고 있던 내가 그의 손이 다리 쪽으로 꺾이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다가 덜컹 간덩이가 내려앉는 충격을 받고 말았으니까.

산천을 진동시키는 대포 소리를 들으며 우리 트럭은 형산강 다리를 건너가고 있었다.

‘지금 이 다리에 한 방 떨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되나.’

나는 납죽 엎드려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리 밑의 시퍼런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죽을 것 같진 않았다. 강물에 떨어진다면 얼마든지 헤엄을 쳐서 강둑까지 나갈 자신이 생겼다. 소달구지보다는 약간 빠른 속력으로 다리를 건넌 트럭이 멈췄다. 아버지 뒤에서 걷고 있던 작은형이 멜빵 달린 가방을 안고 조무래기들 곁으로 올라와 앉았다. 그 안에는 마른 멸치와 대구포와 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자기 또래의 다른 애들처럼 걸어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피난 보따리 꼭대기로 쫓겨온 작은형과 나는 짤막짤막한 대화를 급히 나누었다.

“형아, 대포 맞지?”

“대포가 아니고, 함포사격이다.”

“함포?”

“그래, 함포다.”

“함포가 뭔데?”

“군함에서 쏘는 대포.”

“대포보다 더 세나?”

“훨씬 세다.”

“누가 쏘나? 인민군?”

“아니다, 미군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도망가나?”

“사람들이 없어야 인민군이 시내에 들어오면 맘놓고 쏴대지.”

“맞네.”

“미국은 세다. 천황도 이기고 히틀러도 이겼는데, 김일성이도 곧 이길 거다.”

“원자폭탄은 미국만 가지고 있나?”

“그래.”

“원자폭탄 먹이지 뭐.”

“이런 바보야. 그러면 우리 편도 다 죽는다.”

작은형이 알밤을 먹이려다가 그만뒀다. 그래서 형제는 대화를 그쳤다.

형산강 다리를 건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피난 행렬은 두 갈래로 쪼개졌다. 바다 쪽을 안전하다고 믿는 집들은 구룡포 방면으로 나아가고, 깊은 산중이 더 낫다고 판단한 집들은 장기 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우리 트럭은 장기 가는 신작로로 들어섰다. 아버지의 계획은 포항과 감포의 중간쯤 되는, 잘 아는 집이 있는 산중 마을에 가서 피난보따리를 풀겠다는 것이었다. 피난길이 갈리고 나서 걷고 있던 세 집의 모든 식구가 트럭 위로 올라왔다. 이때부터 트럭은 열심히 젓는 자전거 속력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가든 아직 피난은 나에게 소풍이었다. 남부여대의 긴 행렬이든 간덩이가 떨어지게 만든 함포 소리든 흑인 병사 행렬이든, 눈요기를 위한 풍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속의 어느 구석에선 미국만 가지고 있다는 원자폭탄을 믿으며 느긋해했는지도 몰랐다.

이윽고 트럭이 멈췄다. 우리 식구들이 먼저 내리고, 다른 두 집은 이십여 리 더 떨어진 갯마을로 간다고 했다. 오후 네 시쯤에 우리 식구들이 피난 보따리를 푼 마을은 사방이 낮은 산으로 에워싸인 궁촌이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조선시대 대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첫 유배를 와서 열 달가량 머물렀던 동네와 오 리 남짓 떨어진 곳이라 했다.

아버지가 선택한 피난처는 밤낮 없이 한적했다. 군대 나간 청년들만 아니라면 전쟁과 상관없어 보였다. 어머니한테 귀띔을 듣기로는, 피난 살림을 편안히 받아준 칠십 노인의 아들이 십여 년 전 한때 아버지 밑에서 일한 적 있었으며, 아버지를 잘 따랐던 그는 일제 말기에 징병으로 끌려나갔다가 용케도 탈 없이 돌아와 새로 창설된 우리 군대에 들어갔으니 지금쯤 어느 전선에 있을 것이라 했다.

우리 집 피난살이는 길지 않았다. 보름을 채우지 않았으니까. 나는 배고프지도 심심하지도 않은 날들이었다. 트럭에 싣고 간 양식을 아끼느라 배불리 먹진 못해도 끼니를 거르진 않았으며, 작은형과 나란히 주인 영감께 천자문까지 배웠다. 우리 식구들에겐 참으로 오붓한 피난살이였다. 작은형과 나의 형편으로만 보면, 피난살이가 아니라 외가댁에서 보내는 보람찬 방학 생활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