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옥의 종횡무진]

 

(김미옥 문예평론가)
(김미옥 문예평론가)

 

 

 

 

 

낭만은 지속되어야 한다.

 

역사, 사회과학 등 비문학 책이 쌓여서 당분간 시집이나 소설은 읽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달콤한 픽션』이 눈에 뜨였다.

조용호 작가의 서평에, 방현석 작가의 책 나눔에, 자꾸 밟혔다.

최지애란 이름이 익숙하면서 낯설어 더 궁금해졌다.

책이 오자마자 고분 파듯 파버렸다.

 

소설가 최지애는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온 이무기 작가였다.

책을 내야 용이 되는 건 아니지만 독자에게 온몸으로 다가오는 건 역시 자기 이름을 건 단행본이다. 『달콤한 픽션』엔 모두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동명 소설 「달콤한 픽션」은 2013년 <심훈 문학상>의 ‘소설대상’ 작품이다.

 

나는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불행’을 대하는 현대 젊은 여성의 자세를 생각했다.

나만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불행’은 이들에게 오는 순간 잘못 찾아왔다고 낭패감을 느꼈을 것 같다. 최지애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시대가 뒤엉킨 듯 상황마다 다른 모습으로 튀어나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변주한다.

 

화자인 ‘나’는 대학원을 졸업한 삼십 대 중반의 미혼여성으로 그저 그런 직장에 다닌다.

친구들은 모두 결혼했고 혼자 남았다. 소개팅을 수없이 했지만, 결혼에 이르지 못했고 무책임한 남자와 연애를 한 적은 있다. 술김에 모르는 남자와 원나잇 스탠드를 하고 다음 생리 때까지 임신 걱정으로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친구 중 유일하게 같이 미혼이었던 절친 미주는 남자를 만나 삼 개월 만에 결혼했다.

그러나 직업여성과 불륜 행각을 지속한 남자에게 항의하다 폭행을 당하고 이혼을 결심한다. 그런데 결혼하고 1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동거를 해소하고 그녀는 위자료도 없이 쿨하게 헤어졌다.

‘나’는 그녀와 함께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본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다.

 

''백 분짜리 영화'의 공식을 되새긴다. 현실도 몇 컷의 재빠른 장면 전환으로 사랑과 이별, 시련과 상처가 해결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누구도 섣불리 인생의 결말을 예상할 수 없다. 서른 중반의 그들은 태풍의 눈으로 접어들 운명이면서도 기세 좋게 외친다. 자고로 모든 결말은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의 낭만은 지속되어야 했다.‘“

 

 ('달콤한 픽션', 최지애, 걷는사람', 2023)
 ('달콤한 픽션', 최지애, 걷는사람', 2023)

나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나 사회적으로 불안한 30대 여성들의 우정과 결혼을 그린 이 작품에 맹렬한 흥미를 느꼈다. 또래 세대에서 ‘도태’되는 초조감으로 사랑도 낭만도 없이 급류에 휩쓸리듯 결혼하는 미주의 변이 낯익었다. 결혼할 남자가 어떤 남자냐고 묻자 ”착했다“고 대답한다. 착하다는 말은 상대가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뜻이다.

 

우리 딸들이 최상의 교육을 받으면서 동시에 주입받은 기성세대의 실질적 정신교육은 나름 이원적 잣대를 갖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미주의 경우를 보자.

‘사랑은 없지만’ 안정된 조건을 가진 남자와의 결혼과 ‘사랑이 없기에’ 혼인신고를 1년이 넘도록 뒤로 미루는 것.

조건이 좋다면 법적 지위를 선 취득해야 위치가 탄탄해지고 만약의 사태 시 얻어낼 수 있는 재화가 극대화된다. 그런데도 미주는 법적 지위를 얻지 않은 채 해를 넘겼고 헤어지면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생각건대 그녀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해피 엔딩으로 끝날 수 있는 ‘낭만’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갑자기 코끝이 뜨거워진다. ‘낭만’은 원래 빈털터리가 아니던가.

계산이 빠르고 영악한 세대라고 생각했던 그녀들은 ‘순수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여덟 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스스로 찾아가야 하지만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가게 되어있다.

작가의 눈빛이 참 따뜻하다.

간만에 괜찮은 소설책 한 권을 다 들이켰다.